오랜만에 영화 <질투는 나의 힘>을 다시 봤습니다.
2003년에 개봉한 박찬옥 감독의 작품으로, 박해일, 문성근, 배종옥 배우가 출연하는 영화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비디오 테이프를 빌려와서 VHS데크로 봤습니다. 거진 20년 전이군요 벌써...
박해일 배우는 최근에 <한산>에서 이순신 장군 역할을 맡았었죠. 1977년 생으로 이젠 불혹을 넘긴 중년 배우가 됐지만, <질투는 나의 힘>에서 박해일은 아직 20대의 풋풋함과 어설픈 청춘의 표상입니다.
문성근 배우와 배종옥 배우는 크게 달라지진 않은 것처럼 보이는데, 반대로 생각해보면, 20년 동안 자기 관리를 잘했다는 것이겠지요.
영화도 와인과 같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맛이 깊어지기도 합니다. 그 시대의 공기를 밀봉해놓은 통조림 같다고 할까요? 당시엔 모르지만 지나고 나서야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한 시대의 분위기를 잘 담아낸 영화를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보게 되면 다른 것이 보이기 마련입니다. <질투는 나의 힘>에서 대우차 에스페로와 마카레나 춤 같은 것들이죠. 이젠 도로에서 에스페로는 찾아볼 수 없고, 마카레나 춤을 추는 사람이 있을까요?
물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들 말고 이 영화는 영화 자체로도 아주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자친구의 외도 상대 밑에서 일하게 된 남자가 그 남자와 결국 한 집에 살게 되는 이야기거든요.
이렇게 짧게 요약해보면 무슨 영화가 막장 드라마인줄 알겠지만, 그게 또 아닙니다. 오히려 미숙한 남성과 완숙한 남성 사이의 권력관계를 세밀하게 그린 정밀화에 더 가깝습니다.
이젠 더 이상 우리나라에서 이런 영화가 만들어지긴 어렵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어 씁쓸합니다. 요새 개봉한 영화들만 봐도 다들 탑 배우들이 떼로 나와 판을 키우고 스펙터클이 넘쳐나지만, 이야기는 빈곤한 영화가 많습니다. CG 기술의 괄목한 발전으로 이젠 표현의 가능성도 커졌지만, 아이러니하게 제겐 더 공허하게 느껴집니다.
외국의 히어로물들은 저도 재밌게는 보는 편이지만, 처음 볼 때뿐이고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듭니다. 그래도 유일하게 <스파이더맨 2>는 여러 번 봤습니다. 나름 미장센과 형식적으로 생각해볼거리가 눈에 띄었거든요. 그런데 다른 마블 영화들은 현란한 스펙터클을 걷어내면, 다시 보고 싶은 매력이 없는 이야기뿐입니다.
단순한 취향의 문제일까요? 아님 제가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는 징조일까요?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을 비롯한 승승장구하는 한국 영화와 콘텐츠들이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게 모순은 아니냐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창작자의 역량을 뒷받침해주는 거대 자본(CJ, 넷플릭스)의 힘이 없었다면,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이 나올 수 있었을까요?
CJ가 한국 영화 산업에 기여한 공로는 칭송받아야겠지만, 동시에 현재 영화 산업이 천편일률적으로 안전지향적인 선택만을 반복하고, 새로운 영화가 나오지 못하는 환경에 대해선 책임감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점을 개선하지 않으면 대기업도 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질투는 나의 힘>도 제작 당시에 투자가 안 돼서 만들어지지 못할 뻔했다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투자자나 제작자들 눈에는 이 영화는 돈이 안 되는 영화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그럼에도 이 영화가 만들어져서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거입니다.
지금 만들어지는 소위 대작 영화들도 20년이 지난 후에 누구 하나의 기억 속에서 살아남아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대작 영화, 텐트폴 영화, 블록버스터 같은 자본과 기술, 예술의 절묘한 배합으로 만들어진 훌륭한 영화들은 수십 년이 흘러도 살아남았습니다. <타이타닉>도 1997년 작품이니 25년 전 영화지만, 영화를 본 관객들에겐 셀린 디온의 'My Heart Will Go On'은 강하게 박혀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최근에 <어 퓨 굿 맨>도 다시 보게 됐습니다. 이 영화는 <질투는 나의 힘> 보다 1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지만, 지금 봐도 재밌습니다. 할리우드 영화도 이런 영화를 만들던 시기가 있었지만, 이젠 마블 히어로물이 주류가 된 느낌입니다. 드라마가 탄탄하고 배우들의 연기력이 돋보이는 클래식 영화들의 빈자리를 저만 느끼고 있는 것일까요?
제가 보고 싶은 영화는 아직 개봉하지 않고 있습니다. 언제 즈음, 보게 될 날이 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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